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1989-0322-506%2C_Adolf_Hitler%2C_Kinderbild_retouched.jpg|width=100%]]}}}|| || 갓난아기 시절의 히틀러 || 아돌프 히틀러는 알로이스 히틀러와 클라라 히틀러 사이에서 1889년 4월 20일, 넷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모두 사망했다. 아돌프가 태어난 곳은 [[독일제국|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트리아]]의 접경도시인 [[브라우나우암인]]인데, 얼마 후 도나우 강변의 [[린츠]]로 이사하여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 30여년간 가출한 채 바깥에 있었던 알로이스의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는 히틀러(Hitler)라는 성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타났다.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버리고 히틀러로 성을 바꿨고, 아돌프도 정식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된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운 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왜냐하면 시클그루버라는 성은 촌스러운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갖고 연합군들은 "니네 총통이란 사람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원래 성씨는 '시클그루버'랜다." 라며 전쟁 말년까지 독일군을 조롱했다.[* 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은 모두 명문가 출신이었다. [[샤를 드골|드골]]과 [[윈스턴 처칠|처칠]]은 귀족 집안이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루스벨트]] 역시도 명문가 집안 출신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대대로 구두공 일을 맡아온 아버지 밑에서 ~~맞아가며~~ 자랐지만, [[소련]]은 공산국가라서 노동자 집안 출신인 게 문제가 되지 못했다.] 어린 시절 히틀러의 가정은 지방 세무서장인 아버지 덕에 엄청난 부잣집까지는 아니더라도 히틀러를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에 보낼 만큼 중산층 중에서도 잘 사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가족을 홀대하며 걸핏하면 아내와 자식을 때리고 폭언을 일삼는 난폭한 가장이었다. 이 때문에 아돌프의 이복형 알로이스는 가출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 쯤에 [[영국]]에 정착해 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6촌인 친척누나와 결혼한 아버지에 대한 환멸 탓에 갈등과 증오가 심해졌다는 설도 있다.] 또한 그 와중에 히틀러는 장래 희망 문제로도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빚었는데, 아버지는 난폭하고 권위주의적이었지만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자식들이 힘든 삶을 살기를 원치는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 하는 아들 히틀러에게 [[공무원]]이 되기를 강요하면서 폭력까지 일삼은 탓에 아들과의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단, 히틀러의 아버지 알로이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가족들에게 가난한 삶만큼은 물려주지 않았다. 죽을 무렵 그는 연 2,420크로넨의 연금을 받고 있었는데, 당시 초등학교 교장의 [[연봉]]보다도 많은 금액이었다고 한다. 미망인에게는 연금의 반과 함께 4년치 연금의 1/4이 한꺼번에 지급되었다. 여기에 자녀 1인당 연 230크로넨의 연금으로 나왔다. 만 24세가 되거나 더 이른 나이라도 자립하는 시기에 종료된다는 조건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1 p.43] 히틀러는 공무원이 되기 싫었던 이유로 자유가 없음을 들었다. 자유가 없는 인간으로서 항상 사무실에만 앉아 있어야 하고 자기 시간을 가질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모든 생활의 내용을 서식용지에 일일이 써넣는 일을 강요당해야만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식상하고 하품이 나올 만큼 싫었던 것. 이는 히틀러가 [[나의 투쟁]]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바이다. 그런데 사실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정말 못 했는데다 공부에도 흥미가 전혀 없었다. 흔히 수학만 못 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수학이 유독 전체 꼴찌 수준으로 지나치게 못 한 것이었을 뿐이지 다른 과목들도 잘 하는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중학교 시절 동안 문과 계열 과목 성적들도 다 하위권이었다. 명문 중학교를 다녔긴 했지만, 고등학교 들어가기도 버거운 최하위권 학생이 이런 학교에서 뭐 어쩌란 말인가? 한 번은 시험을 보고 그 하위권 성적표를 받고 화가 나서 같이 공부 못 하는 애들과 어울려 학교 근처 양조장에서 돈을 내고 밤에 폭음 수준으로 [[맥주]]를 퍼마시다가 걸려서 학교 기숙사 사감에게 큰 벌점을 맞았던 적도 있다. 반대로 어머니는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 자식을 여러 번 잃어서 그를 유독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모친도 젊을 때부터 별로 건강이 안 좋아서 히틀러가 10대 후반일 때 죽었다.] 자식의 잦은 사망은 근친관계로 인한 건강 이상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결국엔 히틀러와 동복여동생 파울라만 생존한다. 이 때문인지 동복 여동생 파울라만큼은 오빠 히틀러가 잘 챙겨주었다.[* 히틀러의 어린 시절 친구는 훗날 전쟁이 끝나고 사람들이 그에 대한 질문에서 왜 그와 친구가 되었냐고 묻자 대답한 말이 "어린 시절, 가족들과 함께 강으로 피서를 갔을 때 불쌍한 나의 어머니는 그만 깊은 물에 빠지셨다. 모두 당황했을 때 내 또래의 소년이 물에 뛰어들어 어머니를 구해줬다. 그의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였다."이다.] 아버지 알로이스가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가장인 탓에 히틀러는 아버지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나의 투쟁]]』에서도 아버지의 대한 회상을 일부 볼 수 있는데, 알로이스가 [[뇌일혈]]로 사망했을 당시의 반응을 보면 마냥 히틀러가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기만 했다고 보기 힘들다. 요약하면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존경했으나 사랑을 느낀 기억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인자한 성격의 어머니 클라라는 몹시 좋아했고, 어머니가 자식들을 아끼고 사랑한 터라 어머니와의 관계만큼은 반대로 각별했다. 실제로 어머니 클라라가 사망했을 때 히틀러는 크게 슬퍼했고,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인 에드바르트 블로흐가 "아돌프만큼 어머니를 잃은 슬픔 때문에 그렇게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히틀러의 인종차별적인 행동이 아버지에 대한 반감에서 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알로이스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로서 제국이 표방하는 다민족, 다문화적 그 가치관을 자식들에게 주장했고 특히 알로이스의 근무지인 [[린츠]]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접경지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민족적인 가치관을 가졌고 결혼을 통한 혼혈도 많은 지역이였기 때문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0%93%D0%B8%D1%82%D0%BB%D0%B5%D1%80_1900_%D0%B3._%D0%B2_%D1%86%D0%B5%D0%BD%D1%82%D1%80%D0%B5.jpg|width=100%]]}}}|| || 1900년의 히틀러[*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바로 히틀러다.] || 히틀러는 초등학교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내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실업학교 중등 과정까지는 이수했으나, 고등 과정은 [[유급]] 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나중에 어머니의 간청으로 [[전학]]을 가서 재진학해 보지만, 결국 또다시 자퇴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가 사망했는데, 히틀러가 13살 즈음이 되었던 때였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 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 밉고 싫었어도 막상 죽었을 때만큼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엔 별 다른 타격이 없었다고 한다. * [[유럽]]의 실업학교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취업을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의 [[특성화고등학교]]와는 다르며, 순수 학문을 탐구하는 분야로 진학하지 않으면 보통 실업학교에 갔다. [[일반계 고등학교]]보다 수학과 과학 같은 어려운 교육 과정이 상당히 많으며, 졸업 후에는 취직하거나 이공계 실용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다. 의대나 법대, 자연과학, 인문학, 행정학, 정치외교학 같은 순수 학문으로 진학하려면 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김나지움]] 3년 과정과 아비투어(대학 입학 자격 시험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현재도 유럽의 실업학교는 공부가 힘들고 어려워서 유급당하거나 자퇴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러다 보니 학업에 흥미도 없고 이해력과 끈기도 부족한 히틀러가 이런 어려운 과정에 제대로 적응할 리가 없었다. *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에 따르면 히틀러는 자신이 반유대주의, 독일민족주의에 입각한 레오폴드 푀슈라는 [[역사교사]]의 수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하고 있으며, 비교적 주위에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가 정치적인 선전을 위해서 쑤셔넣은 내용들이 들어가 있다는 주장이 많으며, 히틀러는 유년기에는 역사 시험에서 낙제를 면하지 못할 정도의 형편없는 실력이었다. 히틀러가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부터는 역사에 관한 조예가 꽤 깊어졌는데, 한때 측근이었던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역덕후|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미술]]에 관한 책들과 더불어 독일 근현대 역사책들을 즐겨 읽었다고 한다.[* 특히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기를 자주 읽었다고 한다. 사족이지만, 공산주의자 유대인 에두아르드 푹스가 쓴 에로 미술에 관한 책도 그의 책장에 은밀히 놓여져 있었다고 한다.] 총통이 되고 난 뒤에도 식사 자리에서 종종 세계사 이야기를 한 것을 보면 편견과 달리 [[역사]]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해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